「제로 투 원」을 읽고

2023. 12. 29. 23:18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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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과 1학년 시절 교수님의 추천으로 「제로 투 원」을 읽은 적 있었다. 당시에는 창업과 벤처 업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피터 틸이 누구인지조차 몰랐으며, 기억에 남는 내용이라고는 창조적 혁신을 해야 한다는 책의 대주제뿐이었다. 창업에 대한 확고한 꿈이 생긴 뒤, 스타트업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는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장에서 두 번째로 꺼내게 되었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확장적 진보

컴퓨터과학에는 Willem Poel이 제안한 ZOI rule (Zero, One, Infinity rule)이 있다. 이는 자료 구조에 제한을 두지 않는 소프트웨어 시스템 내에서, 인스턴스는 완전히 금지되거나, 유일하게 존재하거나, 무한히 많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비슷한 예시로 존재론에서는 우주에는 0, 1, 무한의 단 세 가지 양적 개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개체가 두 개 발견되었다면 무한이 많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업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기업(0)이 세상에 공개되는(1) 것은 단 한 번만 비가역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의 유일성이 깨진다면, 비슷한 기업이 무수히 많이(무한)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피터 틸은 「제로 투 원」에서 0에서 1을 만드는 것을 확장적 진보로, 1에서 무한을 만드는 것을 수평적 진보로 정의하였다. 기존에 있던 체계를 무너뜨리는 파괴적 진보가 아니라, 기존의 체계를 확장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창업가의 고민은 여기로 귀결될 것이다. 어떻게 0에서 1을 만드는 확장적 진보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이제까지 확장적 진보를 이루어냈던 기업을 살펴보면 이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 인류에 가장 영향을 마친 "확장적 진보" 사례 중 하나로 아래를 꼽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MnrJzXM7a6o

Steve Jobs introduces iPhone in 2007 (John Schroter)

 
경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상품으로 알려진 아이폰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장적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폰은 기성 휴대전화의 불편함을 없애 압도적으로 편리한 디바이스를 제공한다는 핵심 목표가 있었고, 이를 위해 전화, 인터넷, 아이팟 등 여러 요소를 합쳐 시장을 통일시켰으며, 이를 아이디어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화할 수 있도록 터치스크린, 확대축소 기능 등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 사례를 보면 확장적 진보는 여러 가지 요소가 맞물려야 생기는 것 같다. 고객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거나 현재의 불편함을 압도적인 차이로 해소할 수 있는 핵심 목표, 그리고 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기술적 추진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인터넷과 같이 세상을 바꿀 만한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확장적 진보의 기회가 한번씩 오는 것 같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전에 없던 핀테크 기업(페이팔), E-commerce(아마존) 가 생겨났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바꿀 만한 신기술을 예측할 수 있다면, 확장적 진보를 이루는 기업을 만드는 데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023년 현재 뜨거운 감자에 오른 AI 기술이 과연 확장적 진보를 일으키는 신기술이 될 수 있을까? 더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다.
 

버블 올라타기

신기술이 등장하면 확장적 진보를 일으키는 기업이 생겨나는 것도 맞지만, 이를 뒤따라 수평적 진보를 일으킨 기업들의 가치가 과대평가되는 버블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과열되었던 투자 심리가 한꺼번에 주저앉았던 닷컴버블 사태를 보아도 그렇다. AI도 현재 많은 투자금이 쏠리고 있지만, 실제 가치에 비해 과도한 자금이 들어가 거품이 이미 많이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트렌드에 편승하는 회사는, 1에서 N으로의 수평적 진보만 가능하기에, 거품이 터졌을 때 위험해진다.
 
그러나 버블이 터져도 버블을 올라타고 더욱 성장하는 회사들이 있다. 애플은 닷컴버블 당시 주가가 90% 가까이 폭락했지만 5년 만에 전고점을 돌파하고 신고가를 경신하였다. 이들은 투자 심리에 대한 트렌드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혁신을 이루어냈기 때문에 버블이 터졌음에도 견고할 수 있는 것이다. 투자가 과열되었다 뿐이지, 세상을 바꿀 신기술이 등장했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펀더멘탈을 잘 갖춘 튼튼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제로 투 원」을 읽고, 푼돈을 버는 여러 회사를 창업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적 진보를 일으킬 수 있는 인생을 걸 만한 단 하나의 회사를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Os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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