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8. 17:49ㆍ카테고리 없음
제목 : 모순
저자 : 양귀자
완독일 : 251015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식투자와 기업경영에 대한 관심으로 경제/경영 도서만 연달아 읽다가 머리를 식혀 볼 겸 군부대에 있는 진중문고 소설책들의 제목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눈에 들어온 글자는 책의 제목이 아닌 "양귀자"라는 저자의 이름이었다. 기장에 드라이브를 갔을 때 나혜가 요즘 양귀자 책을 많이 읽는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 제목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쳐들었고, 위병소 근무 휴식 시간마다 틈틈이 책을 읽었다. 오랜만에 페이지가 넘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몰입해서 책을 하루 만에 끝마쳤는데,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정도로 빠르게 읽을 수 있을만큼 재미있었고, 소설에 관한 사전정보를 전혀 접하지 않은 '순수한 독자'를 원한다는 작가의 말은 지켜졌던 것 같다.
제목이 왜 <모순>인지는 단번에 이해가 갔다.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가 쌍둥이이며, 누구와 결혼했는지에 따라 그토록 삶이 달라졌다는 것만으로 모순의 요소를 느꼈다. 하지만 소설에 숨겨진 모순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많아졌다. 두 개의 요소가 상반된 특성을 가지고 대립하는 구도는 책에서 매우 많았다. 어머니와 이모, 아버지와 이모부, 나영규와 김장우는 모두 대립한다. 하나씩 그들의 관계를 뜯어보자.
어머니와 이모
어머니와 이모는 쌍둥이이지만, 어머니가 몇 분 일찍 '김포 아줌마'의 중매를 받는 바람에 어머니는 술주정뱅이의 아내가 됐고, 이모는 부자의 아내가 됐다. 하지만 어머니의 삶은 생동감 있고 굳세다. 행복할 때는 무지하게 행복하고 불행은 있는 그대로 쏟아낸다. 역경이 오면 책을 읽어 극복하고자 하며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이모는 연약하다. 각에 잰 듯한 인생을 지루해하다가 결국 죽음에까지 이른다. 책에는 '결혼 초반에는 이들이 쌍둥이같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가 이모에 비해 훨씬 늙어 보였다' 라는 묘사가 나오는데, 세속적인 우리의 눈으로 보면 번지르르한 남편과 안정적으로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젊게 사는 이모의 모습이 더 좋아보인다. 하지만 결국 누가 죽었는가? 전형적인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았던 이모이다. 더 가난하고 폭력적인 남편과 함께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살았던 어머니가 결국 더 생동감있고 굳세게 살아남은 모순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 이모부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접시를 집어던지고 집기를 때려부수는 주정뱅이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으나 자신의 방식대로 자녀들을 사랑하고, 또 그런 아버지를 자녀들도 사랑한다. 안진진은 자신이 술을 마신 모습에서 술 취한 아버지의 모습을 찾지만, 술이 깬 자신의 모습에서 어머니께 용서를 비는 아버지의 모습을 찾는다. 물론 술을 마시고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루는 짓은 아주 나쁜 짓이지만, 아버지의 삶에서 나는 일종의 낭만을 읽었다. 이모부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모든 것이 각에 잰 듯한 생활을 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장소인 이탈리아지만, 이모부의 로마 여행은 내가 봐도 아주 재미없어보였다. 많이 가지고도 충분히 도전과 낭만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는 나에게는 이모부가 '왜 저러고 사나' 싶었다. 아버지는 중풍과 치매에 걸려도 자녀들과 아내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이모부는 아내를 잃었으며 자녀들은 그의 곁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이모부는 안정을 취한 대신에 인간적인 것들을 잃어버리는 모순을, 아버지는 인간적인 것들을 취한 대신에 안정을 잃어버리는 모순을 보여 주었다.
김장우와 나영규
안진진에게는 두 남자가 결혼상대로 주어진다. 낭만파 김장우와 각에 잰 듯한 "파워J"인 나영규이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쌍둥이라는 불가항력의 요소에 의해 아버지와 이모부 중에 아버지와 결혼했지만, 안진진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진 것이다. 아버지 같은 낭만파 김장우와 결혼할지, 아니면 이모부 같은 나영규와 결혼할지 말이다. 작가는 아버지와 이모부의 대립으로 "낭만적인 삶"이 좋다는 복선을 매우 흘리고서는, 안진진이 김장우를 선택할 것이라고 나를 착각시켰다. 하지만 결국 '헤어진 다음날'이라는 이별노래는 김장우의 것이 되었고, 안진진은 낭만 대신 안정적인 나영규를 택하는 모순을 보여 주었다.
내가 내심 응원했던 커플은 안진진과 김장우였다. 작가는 안진진과 나영규가 잘 되는 것을 보여 줌으로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진 걸까? 내가 그리는 안진진의 미래는 이모부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로마에서 지루한 사진이나 찍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계산에 떨어지는 식사나 한 뒤, 최악의 경우 이모의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돌이켜보면 김장우와 결혼할걸.. 하고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커플의 대립 구도는 영화 <라라랜드>를 생각나게 했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여주 미아는 낭만파 남주 세바스찬(>>이 책에서는 김장우에 해당할 것이다)과의 결혼을 포기하고 성공한 영화배우가 됐다. 그렇게 마지막 장면에서 '만약 세바스찬과 결혼했다면..?'이라고 회상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쩌면 작가는 그냥 '인생은 원래 그런 모순덩어리다'라고 메시지를 던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 내가 꼽은 <모순>의 가장 핵심 문장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나도 <모순>에 등장한 대립구도를 인생에서 만났다고 생각한다. 안정과 도전의 대립이다. 전형적인 의사의 길(의대 졸업하고, 인턴, 레지 하고, 스텝으로 남거나 개원해서 사는 삶)과 도전적인 삶을 사는 것 말이다. 전자의 삶을 살면 내가 40대에 뭐하고 있을지, 50대에 뭐하고 있을지 너무 뻔하게 보이지 않나? 그게 진짜 제대로 사는 인생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각에 잰 듯하게 모든 것이 계획되고 결정된 이모부나 나영규의 삶처럼 살다가 가는 것이다.
도전적인 삶을 살자. (안진진의 아버지처럼 술 마시고 가족에게 무책임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삶에서의 낭만을 남겨 두자. 모든 것이 칼같이 계획된 냉혈한이 되지 말자.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내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추락해 봤자 얼마나 아래까지 가겠냐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직관적 자신감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가장 괜찮은 고등학교 중 하나를 포기하고 학교를 옮길 때도 처음에는 두려웠고, 사랑하는 의과대학 동기들을 두고 육군 징집으로 입대했을 때도 두려웠다. 근데 뭐 지금 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모순적인 건, 안진진에게 선택받은 것은 나영규라는 점이다. 세상이 원하는 답지는 이런 건가...하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