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5. 18:02ㆍ독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1915 - 2001)의 자서전이다.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 기업 가문 중 하나를 일궈 낸 정주영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업을 경영했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궁금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0. 지금의 대기업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아산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을 읽기에 앞서, 소위 "재벌가"라고 불리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기업 가문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고 성장했는지 알아보자. 각각의 사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많은 수의 대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 + [정부의 지원] 으로 생겨났다. 1960~1970년대 고성장을 바탕으로 한 한국의 값싼 노동력이 사업의 주요한 원동력이자 해자가 되었다. 노동 기반의 산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과 맞물려, 고성장 초반에는 섬유나 의류 등 경공업, 후반에는 철강, 중화학 등의 산업이 발전했던 것이다.
아무리 사업을 잘해도, 자본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대기업이 성장하기 어렵다. 현재의 대기업의 자본 출처는 다양한데,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부이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정부는 사업 수완이 좋은 회사들에게 일제가 한국에 설치한 공장 등의 인프라를 무상으로 넘겨주는 귀속재산불하(歸屬財産不下) 정책을 실시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일제의 경성제철소 부지 및 시설을 불하받아 성장했고, 대한제분(현 CJ)은 일제의 동양척식회사의 재산을 불하받아 성장했다. 또한, 경제 개발 계획 당시에는 핵심 육성 산업군에 대해서는 인프라 지원, 자금 지원 등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산업을 키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대그룹의 성장은 꽤나 특이하다. 물론 현대도 일부 불하받은 재산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의 성장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자회사들은 모두 아산 정주영 회장이 바닥에서부터 키워 낸 것들이다. 정주영 회장은 자력갱생에 대한 경영철학이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에, 인수합병조차 꺼렸다고 한다.
1. 신용에 대하여
정주영은 신용은 곧 자산이라고 평생동안 굳게 믿어 왔던 사람이다. 일제 시대 때 사실상 무일푼으로 상경하여 사업을 시작했던 정주영이 신용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여러 가지 일화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쌀 배달원으로 일을 하던 정주영이 쌀가게 복흥상회를 넘겨받은 데에는 신용이 크게 작용했다. "이 사람은 믿어도 된다" 라는 인식을 복흥상회 주인에게 주었기 때문에, 주인 아들 대신 일개 직원이었던 그가 가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동차 수리점을 인수하기 위해 오 영감에게 3000원의 거금을 빌렸다. 그런데 자동차 정비소에 화재가 나서 빌린 돈 전부를 빚지게 되자, 오히려 그는 오 영감을 다시금 찾아가 설득하여 그에게 3500원을 다시금 빌렸다. 오 영감과 자신의 신용에 스크래치를 내지 않기 위해서라면, 빚지고 끝내는 것보다 돈을 다시 빌려 이전 것까지 갚아버리는 것이 낫다는 패기를 보였던 것이다. 그만큼 정주영은 신용을 중시했다.
현대건설이 본격적으로 출범한 이후에도 그는 신용을 무척 중요시하였다. 대형 공사 경험이 전무한 상태로 벌려놓은 고령교 건설 사업은, 교각이 떠내려가고 인플레이션으로 재료값은 계속 오르며 인부들이 파업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은 "사업가에게는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라고 말하면서 20년 동안 빚을 져 가면서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일을 끝마쳤다. 당장의 금전적 손해보다는, "현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맡은 일에 책임을 진다"라는 신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의 벤처기업에서는 투자받은 돈을 잃어도 대표가 유한책임만을 진다. 이런 제도는 낮은 리스크로 기업을 경영할 수 있도록 해 주지만, 신용에 대한 태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정주영의 이야기를 통해, 스타트업을 일으키려는 사람에게도 신용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 놈은 어떤 시련이 와도 무조건 끝까지 일을 책임지고 해낼 놈이다" 라고 상대가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돈에 대하여
정주영은 현재 한국의 4대 재벌가 중 하나를 일궈 낸 사람이지만 이상하리만큼 물욕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돈 말고는 모두 자신의 돈이 아닌 회사의 돈이라고 여겼다. 그의 아내 또한 현대가의 재산 중 정주영이 선물한 재봉틀 말고는 자신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정주영은 그의 자서전에서 진짜 대기업을 일으키고 싶다면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보다 국가의 공익을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적었다. 기업의 특성상 이윤이 남지 않는 사업을 하면 안 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사의 크기를 키우기 위한 것이어이지 자신의 사익을 위한 것이면 안 된다고 하였다.
정주영은 또한 황금만능주의는 절대 배격해야 한다고 적었다. 황금만능주의는 국가가 패망하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비금전적 가치, 이를테면 지식, 실력 등을 갖추는 것을 돈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아야지, 돈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돌아보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정주영이 말한 황금만능주의 사회와 정확히 일치되지 않나? 어떤 직역을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매도하고, 다른 직역은 돈을 잘 번다는 이유로 끌어내리려 하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다. 황금만능주의의 사회적 병폐가 고쳐져야 역설적으로 더 부유하고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한때 스타트업 대표는 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 적이 있다. 스타트업은 분명히 돈 버는 조직이다. 그렇기에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돈이 조직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비금전적인 가치를 비전으로 내세우고 구성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결론을 내린 적 있다. 정주영이 말한 국가의 공익은 대기업으로서의 비금전적 가치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3. 습관에 대하여
정주영 하면 여러 가지 어록이 있다.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비롯해, 그의 진취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어록이 정말 많다. 아래는 올해 초 DHP파트너스 방문 차 마루360 건물에서 촬영한 정주영의 어록이다. (마루360은 아산나눔재단이 제공하는 창업지원센터이다)

이러한 그의 진취적인 철학은 그의 습관이 만들었다. 정주영은 무일푼으로 서울에 상경하고 쌀 배달을 할 때부터 "근면"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사흘 밤을 새어 자전거를 배우고 배달 연습을 한 것이 그의 쌀 배달 업무의 시작이었고, 결국 그는 한 번에 두 가마씩 빠르게 배달하는 "최고의 배달꾼"으로 통하였다. 현대 창업 이후에도 건설현장에서 자는 경우가 숱하였으며, 해외 출장에 가서도 항상 새벽 4시에 기상했다고 한다.
조직의 리더가 가질 수 있는 특성 중에서 게으름은 최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게으른 리더는 구성원에게까지 그 게으름을 전파하기 때문이다. 리더의 근면성실함은 구성원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좋은 본보기인 것 같다. 현대건설의 노동자들도 정주영을 "호랑이"라고 부르며 건설현장에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결국 그의 근면함이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다같이 열심히 일하는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
진취적인 성격에 근면함이 중요한 이유는, 내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면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마인드로 허황된 목표를 잡는 경우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목표를 잘 세우는 메타인지 능력이 정주영의 성공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스프링캠프에서 퇴사하기 전, <창업인재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세션(https://cascade.tistory.com/27)을 한 적 있다. 이쪽 세상에 갓 입문한 나는, 좋은 창업가란 무엇인지에 대해 스타트업 씬의 훌륭한 대표님들께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창업인재란 무엇인가?
그동안 회사에서 세션 준비로 너무 바빠 글을 못 쓰고 있었다. 어제 아침 세션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인턴 연수기간 종료도 2일밖에 남지 않았다. 계약서 쓰던 게 어제 같은데 시간이 정말 빠른
cascade.tistory.com
어떤 창업가가 되어야겠다고 당시에 얻었던 결론보다도, 정주영의 책 1권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르침은 훨씬 본질적이면서도 깊었다. 창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권하고 싶으며 자주 정독하면서 마음가짐의 표준으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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