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회고

秋風古栢鷹生子, 雪月空山虎養精

Oselt 2025. 11. 3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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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고백응생자(秋風古栢鷹生子), 설월공산호양정(雪月空山虎養精)

가을바람 부는 오래된 잣나무에 매가 새끼를 치고, 눈과 달 밝은 텅 빈 산에서는 호랑이가 기운을 기른다.

- 번암 채제공





제목 보고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한문에 어둡다

이 한시는 중학교 1학년 때 <맹꽁이 서당>이라는 역사만화를 보다가, 번암 채제공이 지은 것으로 인상깊다고 생각하여 외워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자연경관을 묘사한 시 같지만, 이 시는 영정조 때의 대신 채제공이 젊은 시절 가난했던 자신을 업신여기는 부잣집 자제들에게 지은 것이다. 가을에 새끼를 치는 매는 당장에는 화려하고 좋아보이지만 겨울나기가 어려울 것이고, 겨울산의 호랑이는 당장은 외로워보이지만 봄을 대비한 힘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채제공은 부잣집 자제들을 매에, 가난한 자신을 호랑이에 빗댄 것이었고, 결국 채제공은 영의정까지 지냈다. 당시 나는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잘난 체 하는 애들을 보고 "쟤들은 매고 내가 호랑이다" 하면서 멘탈을 잡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놓고 만화책은 또 열심히 읽었다

군복무하면서 갑자기 십년 전에 봤던 이 구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제 12월이 되어 겨울이 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최근에 외로움인지 FOMO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을 조금 느꼈기도 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군복무를 하다보면 나만 멈춰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바깥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창구인 휴대폰을 보면 승승장구하면서 축배를 터뜨리는 지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낙엽을 치우고, 설거지 몇십인분어치를 하고, 짐을 나르고 있는데.

오늘 부모님이 면회를 다녀가셨는데, 어차피 전역하면 평생 앞만 보고 달릴 건데 군생활을 힘을 비축해놓는 시간으로 써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그 말이 뭔가 위로가 됐다. "멈춰있는 게 어때서?" 란 생각도 들었고, 채제공 시에 나오는 호랑이가 생각나기도 했다. 열심히 살고계신 바깥세상 분들이 매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지금 뭔가 안 하고있다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책 많이 읽고, 운동 많이 하면서 기운을 아끼는 시간으로 생각하자. 그리고 지금 나한테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제 12월인데, 곧있으면 군생활을 한 지도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좀있으면 벌써 1/3 한 것이다! 또 눈 감았다 뜨면 겨울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즐겁게 지내며 겨울산의 호랑이처럼 기운이나 아껴 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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